언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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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공에서 변호사가 되기까지…'인생역전 드라마' 충북일보. 2012.1

   
"세상에서 처음 나를 인정해 준 누군가를 위해 '인생 첫 목표'라는 걸 세우게 됐어요. 그 뒤 목표달성의 기쁨을 알게 된 저는 그야말로 인생역전까지 이룬 셈이죠."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다소 냉소적인 인상의 그는 '까도남(까칠한 도시남자)' '차도남(차가운 도시남자)' '법조계 얼짱' 등 다수의 수식어가 뒤따른다.
매주 목요일 자정께 방송되는 'CJB 시사진단'에서 진행자로도 얼굴을 알렸다. 방송 첫날 3%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해 방송국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는 후문이다. 

부연설명이 다소 긴 그는 실제 건설, 설비 관련 업종에 종사했던 법무법인 주성의 김한근(40) 변호사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종 건설분쟁, 공정거래 관련 사건을 성공적으로 명쾌하게 처리하고 있는 그다. 

남부럽지 않은 위치에서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는 그도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어두운 순간을 여러 번 맛봤다. 

괴산군 칠성면에서 태어난 그는 2남3녀 중 막내다. 방앗간을 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가끔 농사일을 돕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비교적 조용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중학교에 진학하게 된 그는 할머니, 누나와 청주로 생활권을 옮겼다. 그는 "중학교 시절 공부를 잘 한 것도 아니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학생이었다"고 떠올렸다. 

고교 진학시기에는 "고향에서 홀로되신 어머니를 위해 빨리 취직하겠다"며 청주기계공고 항공정비과를 지원했다. 

그의 고교생활은 엉망이었다. 고1때 2주간 무단결석, 고2때 반성적 50등, 고3때 실습지 무단이탈로 근신 등. 무사히 학교를 졸업한 것만으로 은사들의 배려에 감사해하고 있다. 

첫 직장은 충북대병원 기계실. 말이 병원 기계실이지 최저임금(실 수령액 25만원)에 주주야비(2일 주간, 하루 24시간, 하루 휴무)의 열악한 근무 환경이었다. "당시 기계실에 연세 드신 분이 많았어요. 그 모습이 내 미래라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오더라구요. 사회 초년생이 햇빛도 못보고 지하에서 근무하는 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절로 들더라구요" 

얼마 안 돼 군입대를 하게 된 그는 제대 뒤에도 기계실(삼성빌딩)에 취업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인생 최대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지금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보니 제 자신이 남에게 인정받을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상사 분이 저와 함께 일하고 싶다며 소방설비기사 자격증을 따 놓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처음 남에게 인정받는 그 순간, 그 분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자격증 취득이라는 인생 첫 목표를 정하게 됐지요" 

다시 청주로 내려온 그는 충북대병원 기계실에 재취업했다. 그리고 틈틈이 자격증 공부를 해 마침내 소방설비기사 자격증을 땄다. 그를 향한 대우도 달라졌다. 월급이 올라가고 취업의 문이 넓어진 것이다. 

내친김에 그는 대학 진학도 결심했다.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지원해 사법시험 공부에 매달렸다.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포기할까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시험에 합격했고, 7년 이라는 긴 시간을 공부해 3차 시험을 합격했다. 합격하던 그날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날이었다. 

그는 "합격자 명단을 볼 자신이 없어 친구를 시켰는데 연락이 없더라. 떨어졌구나 했는데 전화가 왔다. 그길로 달려가 내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섰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고 회상했다. 그리고는 막내 뒷바라지에 고생하신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합격소식을 알렸을때 어머니도 내내 우셨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인정해 준 한 사람의 말이 24살이라는 나이에 '자격증'이라는 '첫 인생 목표'를 세울 수 있는 희망이 됐다고 말했다. 작은 말 한마디가 바탕이 돼 7년 이라는 긴 시간을 사법시험에 매달렸고 포기하지 않고 합격에 이를 수 있는 용기가 됐다고 했다. 

그의 인생에서 궁핍은 성공의 자극제가 됐다. 법조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그의 비결은 우수한 재능이나 연줄, 운도 아닌